실패 이력서

이력서(Resume)는 본질적으로 성취만 적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어떤 회사에 있었고, 어떤 프로젝트를 했는지. 거 기까지 가는 길에 몇 번 미끄러졌는지, 몇 번 떨어졌는지는 어디에도 적히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경향이 좀 더 진합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소서에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적긴 하지만, 그건 결국 “그래서 어떻게 멋지게 이겨냈는지”를 위한 도입부에 가깝습니다. 진짜 무너졌던 이야기, 아직 회복 중인 이야기는 빠집니다. 회사 이력서로 가면 그마저도 사라집니다. SNS는 한술 더 뜹니다. 자는 동안 누군가는 또 어딘가에 합격해 있고, 누군가는 또 무언가를 출시해 있습니다.

이런 풍경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완벽함을 일종의 기본값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미끄러진 적 없는 사람이 어딘가엔 정말 있을 것 같고, 나의 분투는 어쩐지 부끄러워집니다. 완벽함을 우상화하게 되고, ‘진짜 성공’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준을 만들게 됩니다.


실패 이력서(failure resume)를 Jzhao님을 통해 접했습니다. 실패 이력서란, 계획대로 풀리지 않은 일들과 거기서 배운 것들을 정리한 목록입니다.

핵심은 실패를 전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제가 제 목표를 향해 얼마나 치열하게 애써왔는지를 기록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몸부림에 영수증을 발급해 주는 셈입니다. 떨어진 자리에 점을 찍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더 자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개별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얻은 배움에 초점이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 안에서는 그게 가능합니다.

이 문서는 제가 여기까지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지, 왜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더 중요하게는, 과거를 돌아보며 배우고 앞으로의 실패를 덜 두려워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실패를 적기 시작한 뒤로 새로운 걸 시도하는 데 좀 더 과감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예전 같으면 “저는 자격이 안 돼”라고 미리 접었을 자리에도 한 번 더 손을 들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미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한 번 더 떨어진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습니까.

나의 실패 이력서

마지막 업데이트 2026.06.01

2023

  • 2학기 학업 소홀
    • 건강에 문제도 있었고, 제가 하고 싶은 것과 학업이 가장 상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때 휴학을 하는 것이 맞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남들과, 친구들과 다른 길을 나아간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 더 솔직하게 말해보면,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학원가에서 기계 같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입학한 저한테 그런 선택지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습니다.

2024

  • 우아한테크코스 탈락
    • 실력 부족도 있었겠지만, 가치관의 문제가 가장 컸습니다.
    • 당시 저는 개발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알고리즘 문제 정도를 TDD를 비롯한 복잡한 절차로 해결하려는 우테코는 저에게 흥미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 흥미와 별개로, 불특정 다수가 제 코드를 보고 리뷰한다는 것에 익숙지 않던 시절이었고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픈소스 범벅인 프로젝트조차 제 코드라며 보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완벽주의에 매몰되어 우테코가 의도했던 테스트/제출/리뷰 등의 학습 목표를 따라가기보다, 완벽한 제출물을 내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이는 그대로 저한테 스트레스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 실패는 아쉬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발자로서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한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 SW 마에스트로 탈락
    • 이 탈락은 그 어떤 탈락보다 더 아팠습니다 - 이거 하나를 바라보고 입대를 연기했었고, 창업을 비롯한 막연했던 제 목표에 구체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첫 번째이자 최고의 기회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제 1년 계획과 SW 개발병 준비가 백지화되었고, 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기분이 들어 정말 속상했습니다.

2025

  • 3학년 1학기 학업 소홀
    • 3학년 1학기 학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와 회사를 병행했기 때문입니다.
    • 제 능력을 너무 과신했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회사 일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학업은 짐처럼 다가왔습니다.
    • 다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했을 때, 3학년 1학기 때 배운 몇 가지 과목들이 이후 저한테 영감과 흥미를 주었습니다.
      (학업을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의 깊이와는 별개로 지식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이후 늦게라도 스스로 공부하여 채워나가게 되었고, 이는 저에게 성장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의 선택만큼은 어떤 게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군요.
  • 산업기사 실기 탈락과 결시
    • 산업기사 실기에 탈락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 정도면 쉽게 붙을 것이라 했었습니다.
    • 응시 전에 잡생각이 많았습니다. 마음은 항상 불안했었고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이후로 불합격이 습관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 저는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후 시험을 결시했습니다.
    • 이로 인해 저의 25년 공군 개발병 탈락 원인은 불합격이 아닌 지원 자격 획득 실패가 되었습니다.

2026

  • SW 개발병 최종불합격
    • 마지노선으로 정해놓은 회차에 두 명 차이로 불합격하였습니다.
    • 최선을 다했고, 실제로 느낌도 좋았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했고, 그만큼 좌절감도 크게 느꼈습니다.